인장장인 민모씨의 국새 제작관련 의혹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보도에 의하면 민씨가 제작한 국새는 전통방식이 아니었고 만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혼자만이 국새제작 비법(?)을 알고 있다는 그의 주장도 엉터리였다는 것이다. 국새를 팔아 큰 장사를 하고 또 정ㆍ관계 요로(要路)에 로비를 했으며 실제로 몇몇 정계의 거물급들이 그의 금도장을 받은 사실도 보도 되었다. 이 같은 보도가 사실이라면 민씨는 국가와 국민 모두를 속인 사기꾼이다. 몇 푼 안되는 재료값으로 금도장을 만들어 수천만원 혹은 수억원을 받아 챙긴 21세기의 봉이 김선달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서울시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될 뻔 했다니 정말 아찔하다. 그야말로 1992년의 가짜 국보274호「귀함별황자총통」조작사건에 비견되는 사건이다. 대장간에서 새로 만든 총통을 한동안 바다에 빠트려 두었다가 건져내어 마치 거북선에 장착되었던 유물인양 속인 사건이었다. 국보로 지정할 당시 문화재위원들은 청와대의 발표만 믿고 물건을 자세히 확인도 하지못한 상태에서 성급히 국보로 지정하였었다. 그러나 나중에 범인들끼리 이익분배 문제로 서로 다투는 과정에서 진실이 만천하에 들어나고 말았다.

 이번 국새사건의 주역은 물론 민씨이다. 그를 일약 국새장인으로 만든 것은 자기자신이 쓴 『옥새』(도서출판 인디북, 2005.7.1)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스스로 국내 유일의 국새제작 전문 장인의 위치에 올랐다. 그는 옥새가 왕가의 ‘비기’에 해당됨으로써 조정에서 인정한 ‘단 한 사람’의 ‘보장(寶匠)’ 즉 ‘옥새전각장’(?)이 주도하여 제작하고 그 기법도 ‘영새부’(?)에 비전으로 전수되어 왔다는 주장을 펴고 있으나 사실 ‘보장’이란 용어 이외는 있지도 않는 말이다. 그의 스승이라는 정기호(1899-1989)선생은 동장의 대가이기는 하나 그가 정부수립후 최초의 국새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정기호가 가지고 있던 것이라고 민씨가 제시한 ‘고옥새간회정도’(?, 아무렇게나 쓴 몇장의 메모장으로 진위여부는 알 수 없음)에 “大韓民國之璽”를 자기가 만들었다고 써놓은 것이 유일하다. 그러나 국새제작이라는 영예스러운 사실에 대한 기록은 석불의 77세 때 전시회(인판연합회보, 1975.10.31)나 79세 때의 신세계백화점 전시회(1978.4.11-17) 도록 등, 어떤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자신이 (자랑)하지 않으면 그 대신 도록에 찬문을 쓴 사람들의 글에서도 나올법한데 그런 내용은 한 줄도 없다. 반면에 “새인도고”에는 선명한 “大韓民國之璽”, “大統領印” 등 인영과 함께 김태석이 글씨를 썼고 박균달이 새겼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민씨와 공동작업으로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대한민국제1호국새 복원추진방안” 보고서(2006.12. 행자부 국가기록원)에는 모든 공식자료는 무시되고 정기호의 “고옥새간회정도”만 채택하여 정기호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결론도, “고옥새간회정도”의 내용도 모두 석연치 않다. 아무튼 이런 믿지못할 보고서에 의해 정기호는 국새장인으로, 그리고 정기호의 제자라고 주장하는 민씨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어찌 민씨 혼자서 가능했겠는가? 오히려 국새제작을 담당한 행자부(당시), 정치권, 언론계, 문화재계 등의 멋진 조연급 연출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설사 정기호가 대한민국 초대 국새를 만들었다고 해서 곧 국새장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가 국새장인으로서 누구의 계보를 어떻게 전수하고 전승해 온 사람이냐가 중요하다. 그러나 정기호의 “고옥새간회정도”에도 이런 내용은 전혀 언급이 없다. 또 민씨가 정기호의 기능을 언제부터 언제까지 또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이론과 실기)을 배웠느냐가 중요하다. 전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십년을 지속적으로 전수교육을 받은 사실이 확인되어야 신빙성이 있다. 국새를 한번 만든 사실을 가지고 계보라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3세대(약 100년)의 전승을 지속적으로 이어와야 전통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몇 번 가서 배운 것을 가지고 전수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혼자만의 비법이라는 말도 언어도단이다. 참고로 고종13년(1876)의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에 보면, 국새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이 총 77명이나 되고 특히 직접 글씨를 쓰고 새기는 작업을 한 ‘보장’만 해도 9명이나 된다. 국새 제작은 어느 한 사람이 혼자 제작한 것이 아니라 여러 장인들의 합작으로 이루어지는 공정이다. 지방 관아에서 까지 장인을 차출해서 공동작업을 하였으며 따라서 어느 한 사람만의 비법 운운하는 것은 경청할만한 가치가 없는 소리다. 정기호(1899-1989) 아들의 진술에서도 전승계보 같은 것은 없었다고 짤라 말하고 있으며, 더구나 민씨가 부친으로부터 국새를 전수받은 제자도 아니었다고 했다. 다만 부친에게 몇 번 와서 무슨 서류를 하나 써 받아 간 것은 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씨의 말만 믿으라는 말인가? 좌우간 민씨는 그 후 갑자기 정기호의 국새제작 기법(비법)을 전수받은 국새장인으로 변해 있었다. 민씨는 자신이 입지가 좁아진 지금, 계속 “비법”이니 “비밀”이라느니 하고 감추려 할 것이 아니라 당당히 언제부터 언제까지 정씨로부터 구체적으로 무엇(이론과 실습)을 전수받았는지 소상히 밝혀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그의 주장은 허구에 불과할 것이다.

 또 국새제작과 관련하여 정부예산으로 구입해 없어진 것으로 보도된 약 1키로그램의 황금에 대해서도 그 용처를 소상히 밝혀야 할 것이다. 실험하다가 그 많은 금을 날렸다는 말은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금은 산화되지 않으며 합금이 된 것이라도 언제든지 분리회수가 가능한 것이다. 일반 금방에서도 반지 만들면서 금이 소실된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행자부는 참 상식 없는 일을 한 것 같다. 행자부가 민씨의 말에 속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관인의 제작방법이 전통방식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처음에 누구의 발상인지,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관인의 내구성 때문인가, 예술적 조각 때문인가? 내구성 때문이라면 현대 과학기술이 전근대적인 주물기술보다 뒤처지기 때문인가?

 또 전통형식을 갖추어 제작하고자 했다면 조선왕조 때는 호조판서가 관인제작의 총 책임자인데 어찌하여 일개 주물 장인에게 ‘제4대 국새제작단장’이라는 거창한 완장을 채워주고 장관은 뒤로 빠졌단 말인가?

 차라리 행자부는 네 번째 국새를 만들면서 전통기법 복원 쑈를 벌였다는 편이 나을 것이다. 민씨가 만든 국새에 신비한 ‘전통’ 비법이라는 모자를 씌우고 한바탕 축제를 벌인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한글 4자의 관인을 만드는데 소비한 국고가 4억5천만원이었다. 기타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다투어 행자부의 전철을 밟았다. 왜 그랬을까?

 언론도 문제가 많았다. 민씨가 유명인사로 된 것은 일부 언론의 지속적인 민씨 띄우기 덕분이었다. 지금 와서 그들은 무슨 말로 발뺌 할 것인가?

 이번에 들어난 국새관련 사기사건은 많은 교훈을 주고있다. 전통문화를 빙자한 한 장사꾼에게 정치권, 관련부처, 언론계 등 모두가 놀아난 총체적 부정이었다. 더구나 민씨는 소위 "전통공예 600년을 이어온 세불 옥새전"을 전시한 공로로 2006년 "올해의 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3,000만원의 상금까지 챙겼다.

 그 누구든 사적 욕심으로 무형문화재의 역사를 조작하는 행위는 유형문화재의 역사유적(사적지)을 교란하는 도굴이나 다름없는 행위이다.

 무형문화재 관련 전문가들이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리게되면 어떤 특정 개인에게 영예를 더해주는 데 기여할 뿐, 민족의 정통성 보전에는 오히려 해가 될 것이다.

 조선왕조시대에도 국새는 수시로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 세대이상 혹은 그 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한번 제작하는 일이기에 특별히 국새장인을 둘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국새 제작이 필요할 때에는 중앙과 지방관아에서 장인들을 차출하여 공동으로 국새를 제작한 후, 유공자에게 포상하고 해산하는 것이 상례였다. 따라서 국새장인 몇 대니 하는 말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앞으로 경찰수사에서 소상히 밝혀지겠지만 의롭지 못한 범죄자가 만든 국새가 찍힌 임명장이나 훈장증을 받는 사람의 기분이 어떨까 한번 상상해 본다. (문학박사 이장열)